인생이란 무엇인가 - 행복해져라. 행복해지리라. | Diary

다른이에게 무언가 설명할 때 익히 알려진 내용을 바탕으로 설명하면 좀 더 설득력이 있다.
뭐, 자신이 설명하려는 상황을 직접 예를 만들기 귀찮거나 힘들 수 있도 있고,
심지어 어울리지 않는 예일지라도 얼핏 생각하면 그런가보다.. 하는 사람들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런 이유로,
하나의 예를 들어보겠다.

- 성경에 보면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고,
에덴동산에 아담과 이브가 살고 있었다.
그들은 생물학적으로는 지금의 사람과 같았겠지만,
감성만이 존재했을뿐
우리들이 '이성'이라고 부르는 능력을 활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뱀의 유혹에 선악과를 먹는다.
선악과.
금단의 열매.
나는 이 열매가 이성의 열매였다고 본다.
하느님이 창조한 다른 생물들과 다를바 없이 자연의 일부로서 살아가던 인간은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된다.

여기서 하나의 예를 더 들어보자.
바보들이 사는 마을이 있다.
그들은 바보로서 바보답게 바보스럽게 살아간다.
어느날 그 바보들 중 한 명이 똑똑해졌다.
상상해 보자.
당신이 똑똑이라면 바보들만 우글거리는 마을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바보들을 이용해서 편하게 살고 싶지 않다면 거짓말이리라.
현실에서 톨스토이의 이반 같은 사람은 똑똑이를 위해 열심히 일할 뿐이다.
이성을 가진 인간은 이기적 인간이다.
자, 이제 당신이 바보가 아니라 이 마을을 지켜보는 신이라고 생각해보자.
아니, 모든 생물은 이기적이지만('이기적 유전자'를 읽어보진 않았지만 유전자가 이기적이라는 데에 동의한다.)
이성을 가진 똑똑이가 얄밉지 않겠는가.

성경의 내용은 단지 상직적일 뿐이지만 선악과와 관련된 내 해석은 이렇다.


- 그 시작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든
최근의 인간은 이성을 가진 존재이다.
우리는 이성을 갖출 '가능성'을 지니고 태어나서,
보통 사회 속에서 살다가 죽는다.
탄생과 죽음.
그 사이에 존재하는 삶.

과연 인간의 삶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인간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고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 것일까?

중학시절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던 이 문제는
인간의 삶은 다른 동물의 삶과는 다른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읽은 어떤 내용도 人生에 대한 나의 의문을 풀어주지 못했다.
그래서 생각했다.
답을 찾을 때까지 그저, 그저 행복하게 살아보자.

행복한 삶.
단지 행복하게 살면 그만인 것일까?

이제서야 내린 결론은
그저 행복하게 살면 그만이다.
라는 것이다.
당시 그렇게도 피하고 싶던 결론.
인간의 삶에 뭔가 이루어야 할 특별한 목적은 없다는 결론.
임시방편으로 내렸던 결론.

인간으로서의 삶의 목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행복하게 살아라.


- 솔직히 말해서 나는 우월감을 느끼며 살고 싶다.
남들보다 내가 잘낫다는 기분.
겉으로 내색하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하며 살지만 마음속으로는 '잘난척'하며 살아왔다.
이것은 오래된 내 성격의 일부이고 쉽사리 바뀔성 싶지 않다.

나는 내가 인생의 목적에 대해 생각한다는 데에 우월감을 느꼈다.
설령 답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인간이라면 삶의 목적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과연 다른 사람들은 이 문제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있었던 것일까 하는 생각.

모든 애벌래가 높은 기둥을 향해 기어가고 있을 때,
도대체 저 기둥을 오르면 무엇이 있을까? 기둥을 오르는 이유가 뭐지?
고민하는 애벌레.
(동화속에서는 기둥을 오르는 일이 부질없는 일이었지만)
결국 애벌래가 기둥을 올라야 할지라도 애벌레의 고민이 우월감을 느낄만한 행동이었을까?

확실한 것은 이제 다른 사람의 삶을 비웃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엔 대부분의 사람들을 조금이나마 비웃었다.
일하고 일하고 일하고 일하고 일하고...
가끔 쉬는 사람들.


- 인간은 좀 더 많은 가능성을 가진 존재이다.
인간의 가능성.
주사위를 던졌을 때 어떤 숫자가 나오든 잘잘못을 따지지 않듯이
인간의 가능성 역시 가치판단이 제외된 문제이다.
토끼가 풀을 뜯어먹는 것,
사자가 사슴을 잡아먹는 것에 가치판단이 개입될 수 없듯이.

인간이 어떤 삶을 살든 그 삶에대한 진정한 객관적인 판단은 있을 수 없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 작년 한해 떠들석하던 살인마 유영철.
그에 대한 판단 역시 수많은 주관적인 판단이 가능할뿐,
객관적으로 그가 '나쁘다'라고 말할 수 없다.
물론 나의 주관적인 판단 역시 유영철이 나쁘다는 것이다.
그는 어쩌면, 어쩌면내게도 해가 될 수 있는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인간이 어떤 삶을 살든 그에 대한 객관적인 판단은 불가능하다.


- 신선한 아침 공기를 마시는 것,
따스한 아침 햇살을 맞는 것,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
이런데서 느끼는 행복을 자연적 행복이라고 하자.

재미있는 책을 읽는 것,
멋진 차를 사는 것,
돈을 많이 버는 것.
이런데서 느끼는 행복을 이성적 행복이라고 하자.

자연적 행복은 그 자체가 행복이지만
이성적 행복은 그 자체로 행복일 수도 있고,
앞으로 누릴 수 있는 자연적 행복에대한 행복일 수도 있다.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살아간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좀 더 행복해질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있다.
우리는 누리고자 하는 행복은 사회적 교육의 결과인 경우가 많다.
적어도 내가 살아온 24년간 끊임없이 '돈을 벌어서 행복해지라'는 얘기를 들었다.

얼마전에
과거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더낸 세대의 노동의 대가가 고작 아파트 한 채 마련하는 것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부자 마을과거지 마을이 있다.
부자는 대개 거지보다 더 행복한 삶을 사는데,
거지 역시 살아가며 행복을 느낄 수 있다.
거지가 더 많은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을 비난할 사람은 없을듯 하다.
그런데 부자가 좀 더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비난받을 일일까?

어떤 삶이라도 행복을 느끼며 살 수 있다.
행복이라는 것이 수치적으로 표현될 수는 없는 것이지만,
좀 더 많은 행복을 추구한다는 표현 정도는 가능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좀 더 많은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는데,
시나브로 그 기회를 놓치고 있다.

고등학교 윤리 교과서에서였던가..
사회 시스템을 고안할 때,
자신이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다시 태어난다는 가정하에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는 철학자의 주장에 굉장히 공감이 갔다.
하지만 사회는 기득권층을 위해 만들어지고 수정되고 있기 때문에
다수의 사람들은 그들도 모르는 사이에 행복의 가능성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역시 이것에 대한 객관적 가치판단은 있을 수 없겠지만
(내가 말하는 객관적 가치판단이 살인마의 행동 역시 나쁘다 말하지 않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안타까운 것이 사실이다.


- 자신이 세상에 필요없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과연 좌절할 필요가 있는 것일까?
이 문제에 대한 답이 어찌되었든
이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큰 상실감을 겪는다.
이는 끊임없이 쓸모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세뇌된 탓이다.
일 잘하는 소는 존재의 가치가 있고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소는 존재의 가치가 없다고 주입된 탓이다.
어쩌면, 결국 그 존재의 증명이라는 것이 기득권층의 안위를 위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일할 시기라 여겨지는 때에 일자리를 갖지 못할 경우, 일자리를 잃었을경우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하게 되는
것이다.
역시나 안타까운 일이다.


- 나 역시 끊임없는 세뇌를 통해 비뚤어진 행복관이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인생의 목적에 대해 고민했듯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시작할 것이다.
지금까지처럼 인간의 삶은 뭔가 있지 않을까 하는 맺지 못한 생각을 남겨둔 채로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목적이 행복이라는 확신 아래 고민할 것이다.

그리고,
만일 내게 자식이 생긴다면,
사회적으로 이루어지는 비뚤어진 행복관에 대한 주입이 아닌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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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만일
정말
필요하다면
세상을 뒤집어 엎을 수도 있지 않을까?


- 적어도 내사 사는 이 사회는 꽤나 견고한 틀로 이루어져 있어서
기득권층이 아닌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득권층에 착취당하며 살아야 한다.
한 개인이 뒤집기 어려운 문제지만
한편으론 뛰어난 한 개인의 주도 아래 단번에 뒤엎어버릴 수 있는 구조이기도하다.
다수가 소수에 지배당하는 상황이니까.

극단적으로 소수를 모두 제거해버릴 수도 있겠고,
덜 극단적인 방법으로는 의식개혁을 통한 사회개혁이 있겠다.
비난하고 싶지는 않지만 어리석은 대부분의 다수로 인해 사회개혁에 대한 가능성은 낮아보인다.
어디까지나 가능성이 있을 뿐이다.

이왕이면 부자 마을에 살고 싶은데 부자 마을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거지 마을에서 살 수도 있지만 부자 마을을 바꿀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의 사회 속에서도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왜 자꾸 개혁을 말하는 것인가.
착취의 정도가 개혁에 필요한 노력과 혼란을 감수할만큼 지나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의 행복이 타의에 의해 방해받을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저울질을 해야한다.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가능성만 존재할 뿐인 개혁에 나의 시간을 투자하는 것.
지금의 사회 속에서 행복을 찾는 것.

제3의길.
그것은 좀 더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을 찾아서
좀 더 행동력이 있는 사람을 찾아서
나 대신 행동하도록 부추기는 것이다.

그것이 뛰어난 한 개인이 가장 하기 쉬운 일이다.

어디에 있는지 존재조차 알 수 없는 뛰어난 한 개인이여,
큰 거 안 바란다.
뒤에서 바람 좀 넣어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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